3.23(토) 그리스 여행 2일차
다녀온 곳
1.CORINTH 고고학 유적지및 박물관
2. CONRINTH 운하
신화와 역사가 살아 숨쉬는 땅 그리스 여행을 3.23일 코린트에서 부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사도 바울의 편지인 신약 성경 고린도 전서,후서로 잘 알려진 곳이라
이름은 친숙하다. 헬라어는 Korinthos, 라틴어는 Corinthus, 영어로는 Corinth인
이 도시를 고린도라고 발음하는 것이 나는 편하다. 구한말 선교사들은 성경에
나오는고린도,아덴(아테네),
빌립보(Philippi),에베소(Epesus)등 지명과 인명들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발음하기 좋게 번역했는데 나는 이것이 우리 음운체계에 맞는 탁월한 번역이라고 본다.
코린트는 BC1100년대부터 그리스 세계의 상업과 교통의 중심으로 매우 번성했고 BC8세기에는 인구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드리아해의 섬들과 이태리 남부 해안, 시칠리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는 코린트 지협이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를 연결해 주는 교통의 요지라서 교역로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코린트는 지협 양쪽에 두개의 항구를 거느린 해상 교역로의 요충이었다.
에게해의 켕그레아이 (Kenchreai. 현재 지명은 Kechries)항구와 이오니아
해의 레기온 항이 지협 양안의 두개의 항구였다.
아시아로 부터 들어오는 모든 물자는 코린트의 외항 켕그레아이(Kenchreai)로 집하 되었다가 일부는 그리스로 팔려 나가고 , 일부는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돌아 해상으로, 또는 코린트 지협을 건너 레기온항에서
이오니아해를 거쳐 이태리로 운송하는등 교역로상의 요지로 번성하였고 ,또한 도자기와 올리브, 청동기들을 수출하여 크게 번영하게 되었다.
모든 남자가 다 코린트로 항해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은
모두가 코린트로 가는 행운을 잡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당시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여명의 여사제가 있었는데 선원들및 부유한 남자들이 코린트에 상륙하여 신탁을 듣고 창녀이기도 했던 여사제들과 밀회를 즐기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고린도 전서)에서 탕녀와 결합하지 말라고 당부했을까?
번영하던 코린트는 페르시아 전쟁이후에는 아테네의 견제를 받아 다소 세가 약화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번성했다. 하지만 그리스의 POLIS
전체가 마케도니아에 의해 멸망하고 이후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가 진압당하고
로마 장군 무미우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원하는 것이 뭐냐고 묻자, 대왕이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달라고
했다는 알렉산더 대왕과 견유학파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유명한 일화도 이 도시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로마는 코린트를 재건하여 다시 번영하게 되고 사도 바울이 왔을때는 코린트는 로마의 속주중에 가장 번성하는 도시였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코린트에서 보게 되는 대부분의 유물은 로마 시대의 것이다.
[고대 코린트 유적지]
23일 오전 08시경 아테네 공항인근을 출발하여 코린트 유적지에 도착하니
0900경이었다.유적지에서 보면 크게 높지는 않으나 꽤 가팔라 보이는 산이 눈에
들어 오는데 시지포스 산이다.전설이 서린 글라우케 샘을 거쳐 이곳을 상징하는
아테네 신전에 이르러 신전과 시지포스 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친구 안 선생은 말로만 듣던 시지포스 산을 보게 되었다고 감격해 하며 그리스에 온것을 실감하였다.
멀리서 보면 바위를 굴려 올려도 올려도 정상 부근에서 다시 굴러 떨어질것 같을 정도로 산세가 험하다.고대인들이 시지포스가 평생 바위를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을 장소로
상상하기 딱 좋은 산세다.
수천년 흥망 성쇠를 뒤로 하고 폐허가 된 유적지에는 다 무너진 아폴로 신전의
기둥만 우뚝 서 있고 건물의 잔해들인 돌덩이들은 쓸쓸히 잡초에 뒹굴고 있었다.
안내판을 보며 GLAUKE 우물, 옥타비아 신전, 베마터, STOA, 아폴로 신전,AGORA,
레카이온 도로등을 찬찬히 둘러 보았지만 안내판에 있는 설명문을 꼼꼼히 읽지 않으면
무슨 유적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건물의 잔해들은 잡초 가득한 땅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사도 바울의 사연이 있는 베마터에 들려 유대인들에게 고발당한 바울의 고난을 생각해 보았고, 고대 레카이온 항으로 연결된 BC 5세기에 만든 레카이온 대로를 걸으며 번성했던 코린트를 상상해 보았다.
고대 코린트를 상징하는 건물은 아폴론 신전이다. 이 신전은 BC 6세기에 지은 고대 코린트에 남은 유일한 그리스 시대의 건축물이다. 도리아식 기둥이 7개만 남았지만 여전히 아름다워 우리들은 이 신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많이 찍는등 시간을 보냈다.
[코린트 고고학 박물관]
코린트 유적지 입장권으로 박물관을 같이 볼수 있다. 아담한 규모지만 코린트 지역에서 발굴된 신석기 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의 다양한 유물들이 있다. 박물관 뜰에는 목없는 대리석상들을 많이 볼수 있는데, 목없이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두상을 붙여 주문에 신속히 대응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스의 어느 박물관에서도 공통적으로 감탄하는 일이지만 , 여기서도 고대의 대리석상들의 뛰어난 인체 표현과 2500-4000년전에
제작된 도자기들에 그려진 아름다운 문양에 감탄했다.
[코린트 운하]
코린토스 지협은 길이는 15km, 넓이는 6km에 불과 하다.
고대 코린트인들은 지협 한편에서 건너편 바다로 배를 끌어다 주고
돈을 받았다. 지협을 통과하면 이태리로 가는 항로를 320km나 단축할 뿐만 아니라
안전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점에 착안하여 지협에 운하를 굴착하는 시도는
여러번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BC6세기 코린트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 로마의
갈리쿨라 황제때에도 계획을 세웠으나 중단되었고 네로 황제(AD37-68)때에도 전쟁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운하는 1882-1893년 사이의 12년간의 역사끝에 완공되었다. 길이는 6.4km이지만
폭은 25m, 깊이는 8m의 이 운하는 현대의 화물선은 통항이 불가하여 작은 여객선만이
다니는 관광용 운하가 되어 버렸다. 우리가 방문한 때에는(3.23일 오후 3시) 준설 공사로
인해 선박이 진입을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 암반을 굴착하여 만든 운하라, 다리위에서 보면
깍아지른 절벽 밑으로 한 줄기 푸른 물줄기가 흐르는 운하가 볼만하다. 번지 점프의
명소라고 한다.
(위)베마.시민들의 자유 발언대.코린트의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고발했을때 로마 관리 갈리오가 베마에 서서 유대인끼리의 문제는 유대인 내부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연설했다고 한다.
(위)코린트 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