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24년 인도여행.델리(12월14일)

낙산유정 2024. 12. 15. 00:48

돌아본 곳
오전 : 인디안 게이트
           우그라센키 바오리(계단식 우물)
           악사르담 사원

           간디 박물관
             

오후  : 후마윤 묘
            꾸뜹 미나르

 
(인디안 게이트)


 
08시에 숙수를 나서서 INDIAN GATE로 향했다. 인디언 게이트는 뉴델리의 라즈파트(Rajpath)
에 위치해 있다. 라자파트는 왕의 길이라는 뜻으로 뉴델리 중심부에 있는
대통령궁에서 시작해  인디안 게이트에 이르는 3-4KM의 길로 의회 의사당, 정부 청사 등
엄청난 건물이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설명했기 때문에  어느 것이 대통령궁이고
어느 건물이 의사당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다만 모든 건물이 규모가 엄청나서 인도가
대국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인디언 게이트는 1차 대전중에 전사한 9만 명의 인도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고 문에는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건축물은 인도의 독립을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이라고 한다. 높이 42M로 파리 개선문을
본떠지었지만 개선문 보다 높다. 
인디안 게이트 뒤에는 한 군인이 경례하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인도 국민군을 이끌고 영국에
무장 투쟁을 한 Subhas Chandra Bose라는 인물의 동상이다.  2022년 모디 총리에 의해
건립이 되었다고 한다.
인디안 게이트는 낮에도 좋지만 조명을 환히 받는  야경이 더 아름답다고
하는데 13일 저녁에 차 타고 지나가며 보았을 뿐이다. 다시 올 기회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인도가 영국 식민지 시절에 본국 비용이라는 게 있었다. 본국 비용은 인도에 파견된 영국 관리, 군인등
의 비용을 포함한 모든 식민통치 비용을 인도가 전적으로 부담하는 것을 말하는데 ,
영국의 전쟁에 동원되는 인도 주둔 영국군 및 인도군인들의 비용도 포함된다.
본국 비용은 인도 전체 세출의 1/4이나 차지할 정도로 막대했다. 영국은 인도 통치에 필요한 모든
직 간접 비용을 모두 인도인에게 부담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국의 대외 전쟁에도 인적 물적
자원을 인도에게 상당 부분 시켰을 정도로 영국의 식민 통치는 교묘했다.
간디나 네루 등 인도의 지도자들은 2차 대전등 영국의 전쟁에 인도 군인의 파병을 적극 찬성했는데
파병이 인도의 권리 주장과 영국에 독립 청원을 하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차 대전에 희생된 인도 군인들의 추모 시설인 인디안 게이트 앞에서 이러한 영국의 교묘한 
식민통치를 생각해 보았다.
 

(위)뉴델리 라자파트 거리에 있는 의사당등 국가건물들
(위)인디안 게이트
(위)인디안 게이트 뒤의 Subhas Chandra Bose 동상.식민지 인도의 무장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우그라센키 바오리 : Ugrasen Ki Baoli)

 델리 중심지에 있는 물을 가둬 놓은 계단식 우물(Baoli)이다. Agrasen(혹은 Ugrasen) Ki Baoli라고
하며 대 서사시 Mahabharata에 등장하는 고대의 전설적인 왕 Ugrasen 이 지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축조 연대는 모른다
안내판에는  14세기 델리 술탄국 시대에 투클라크(Tughlaq) 혹은 Lodi 후기 시대와 닮은 양식이라고
나와 있어, 고대에 지은 우물을 토대로 14세기에 다시 쌓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길이 60m 넓이 15m SIZE에 108개의 계단이 우물가로 내려가는 구조로 되어있고 내려가는 좌우 벽면에
시대를 달리하는 3개 층이 존재하며 각기 아름다운 아치형 감실(Arched corridors)들이 연속해 있다.
델리 최초의 계단식 우물이라고 한다. 북인도가 물이 부족한 지역이라 구자랏 , 라자스탄에도 계단식
우물이 분포해 있다고 한다.

 

(스와미마랴얀 악샤르담 사원. Swaminarayan Akshardham Temple)

BAPS라는 힌두교의 한 종파에 의해 건축된 인도 최대의 힌두교 사원이다.
사원 전체의 면적이 240,000SQMT(약77,000평, 축구장 30개)크기로 광대하다

악샤르담 사원에는 카메라 , 핸드폰은 물론 어떤 전자 기기도 가지고 들어 갈 수 없고
물론 사진 촬영도 금지 되어있다. 사원에 입장하기 전 휴대품과 몸 검사가 있는데 같이 갔던
일행 중 한 분이 DIGITAL 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입장이 안되어 다시 휴대품 보관소에 가서
시계를 맡기고 난 후에야 들어올 수 있었을 정도로 일체의 전자제품 반입 금지는 철저했다.
따라서 버스 안에서 멀리 사원을 바라보며 몇 장의 사진을 찍은 것이 악샤르담 사진의 전부다.
신성한 사원 내부에서 사진을 금지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바깥에서 건물 외부를 촬영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납득이 안되었다.
사원을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신발을 벗고 들어 가야 하는데  사원이 앉은 부지 및 건물의
크기가 엄청나다. 유럽의 어느 성당도 악샤르담 사원의 크기에 미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MAIN TEMPEL인 Akshardham Mandir의 규모는 대단하다.
거의 정방형인 가로 세로 109m/96m 높이 43m의 건물은 5-6개의 DOM형 지붕이 덮여 있다.
분홍빛 사암과 흰색 이태리 대리석만으로 지었다고 하며 콘크리트나 철로 된 자재를 일절
쓰지 않았다고 한다. 건물의 내 외부는 정교한 아름다운 조각들로 가득한데 사진  폰이나 카메라는 반입조차 금지되어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쉽다.
Akshardham은 神의 신성한 거주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 원 안에는 BAPS의 창시자인
BHGWAN SWAMINARAYAN(1781-1830)의 화려한 坐像이 마치 절의 부처님처럼 모셔져 있다.
BAPS힌두 교단에서는  이 사람을 신의 화신(아바타)이라고 평가한다고 한다.
Swaminarayan Akshardham사원은 이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BAPS교파의 사원이라는데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라고 해도 근대의 인물을 신의 화신으로 모신다는 것이 힌두교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해가 불가하다.
11,000명의 공예가들, 8000여 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3억 MAN HOUR를 들여 불과 5년 만에
공사를 마치고 2005년 11월에 완공을 했다고 하니, 종교의 힘이란 참으로 대단하다.
그것도 힌두교 전체가 아닌  BAPS라는 힌두교의 한 종파에서 이 정도 사원을 건립할 수 있다니
인도에서 힌두교가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실감했다.

델리의 악샤르담 사원
델리 악샤르담 메인 빌딩인 Akshardam Mandir내부에 있는 Bwagwan Swaminarayan (1781-1830)좌상.힌두교 거대교파 BAPS의 창시자이자 신의 화신이라고 한다.위 세장의 사진은 모두 구글에서 퍼왔다


 
(간디 박물관 , Gandhi Smriti)

인도의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가 생애 마지막 144일을 보냈고 암살당한 Birla House라는 건물을
1971년 인도 정부가 매입해서 간디 기념관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Birla House는 간디 및 인도 독립의
영웅 Sardar Patel도 자주 묵었던 곳이라고 한다.
아내와 나는 간디가 묵었던 소박한 room, 간디의 기록물 사진, 신문, 책, 원고등을 보존한 박물관,
그리고 암살당한 spot을 방문하며 위대한 인도의 영혼이자 20세기의 성자의 발자취를 둘러보며
경의를 표했다.

물레를 돌리는 간디 상

 

(위)간디가 암살당한 장소

 

소년 시절의 간디

 

(위).간디가 묵었던 소박한 방.

 

(위)간디와 Sadar Patel의 1948.1월30일 마지막 meeting.파텔은 인도 독립과 통합에 지대한 공헌이 있는 인물로 초대 인도 부총리를 지냈다. 네루보다 초대 총리로 더 유력했으나 간디는 자신과 가까웠던 네루를 밀었다고 한다.구자랏주에 있는 파텔의 동상이 세계 최대라고 하는데 높이가 182m에 이른다.



 (후마윤 묘 HUMAYUN'S TOMB)

Mughal 제국의 2대 황제 Humayun이 1556년 죽은 후 9년 후 그의 황비 Bega Begum의 명으로
1565에 착공해 1572년에 완공되었다. 후마윤뿐 아니라 그의 아내 Bega Begum 및 수많은
후임 황제들 및 주요 황족들이 묻혀 있고 별다른 표식이 없어 누구의 묘인지도 모르는 묘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인도 최초로 페르시아식 정원을 무덤과 함께 조성한 정원식 무덤 건축이며, Persia 건축가들에 의해
전형적인 四分樣式 정원과 수로가 있다.
붉은 사암과 흰 대리석을 사용한 DOUBLE DOM 양식으로 후대의 인도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건물을 보면 타지마할을 보는 느낌이 난다. 내가 보낸 사진을 본 지인들은 타지마할에 갔느냐고
물을  정도로 타지마할은 후마윤의 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1993년 UNESCO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후마윤의 영묘 건물.정원이 있는 영묘인 후마윤의 묘는 아름다운 건물과 정원이 볼거리지. 내부는 크게 볼것이 없다.
건물 내부의 돔 천정.착시호과에 의해 돔 처럼 보이나 실제는 평면이다
영묘 내부의 관.

 

(꾸뜹 미나르 유적군, QUTUB MINAR COMPLEX)


델리에서는 마지막으로 간 관광지이다.
13세기에 북인도에 진출한 이슬람 세력의 통치 시기를 델리 술탄 시대(1206-1526) 한다.
초기 술탄들이 노예출신이라고 해서  델리 술탄시대의 첫 왕조를 노예왕조(MAMLUK DYNASTY)
라고도 한다. 델리를 중심으로 북인도와 벵갈지방을 통치한 5개의 왕조중 초기에 꾸뜹 왕조(1206-1287)
가 있었다. 꾸뜹 왕조의 초대 술탄 꾸뜹 웃딘 아이박(재위 1192-1210)은 델리를 정복한 상징물로
높은 첨탑과 이슬람 사원을 건설하였다. 첨탑(미나르)은 아이박 시대에는 단층으로 건설되었다가 ,
아이박의 후계자인 일투트미시(재위 1211-36) 시대에 3층이 더해졌고,
피루즈 샤 투클락(재위 1351-88) 시대에 꼭대기 한 층이 더해져 총  5층에 높이 73M로 완공되었다.
이 탑은 인도에서 가장 높은 석탑으로 타지마할의 미나르 보다는 불과 5ft 낮다고 안내판에 나와있다.
(인도가 보이는 인도사 및 현지 표지판 참고함)
탑신에는 꾸란 구절이 새겨져 있고 이슬람 특유의 기하학적인 아름다운 문양도 볼 수 있다.
가이드가 카메라 앵글을 조절하여 우리를 탑과 같이 길게, 롱다리로 기념사진을 찍어 주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꾸뜹 미나르 옆에 인도 최초의 이슬람 사원인 꾸와뜨 울 이슬람 모스크가 있고
이슬람 세력이 파괴하여 폐허가 된 힌두교 사원들이 도처에 늘려 있는 등  
꾸뜹 미나르 유적군은 상당히 볼거리가 많은 site였다.

(위) 꾸뜹 미나르
(위) 키작은 사람들을 비현실적인 롱다리로 찍었다

 

(위)미나르에 새겨진 꾸란 구절과 기하학적인 문양
(위) 꾸와뜨 울 이슬람 모스크. 아치만 남아있다
(위) 꾸와뜨 울 이슬람 모스크 앞 마당에 있는 철기둥. 굽타 제국시대 찬드라 굽타 왕 시기(AD375-413)에 새워졌고, 산스크리트어로 명문이 새겨져 있다.땅에 묻힌 93CM 포함 총 7.2M 높이의 철기둥이다. 약1600여년 동안 크게 녹슬지도 않고 보존 되었다는 것은 고대 인도의 우수한 철기 기술을 증명해 준다고 하며 인도인 가이드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위)폐허가 된 사원의 회랑안에서

 

(위) 알라이 미나르. 알라 웃딘 킬지(재위 1296-1316)술탄에 의해 짓다가 만 미나르. 그는 꾸뜹 미나르의 2배 높이의 탑을 짓고자 했으나 , 그의 생전에는 25M만 완성되었고, 그이후는 누구도 공사를 하지 않은 미완의 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