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영남 남인과 벼슬 2010.11.21일 조 영우
흔히들 이야기 한다. 안동김씨 세도 정치 60년에서 시작하여 박정희, 김 영삼 정권까지
거의 100년을 영남 사람들이 정권을 독점했다고…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사실과 거리가 먼 대중의
오해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조선 후기 이후 영남사람들이 권력을 독과점
했다고 인식하고 있다.
안동 김씨考
이 같은 오해는 안동김씨(장동김씨)의 세도 정치 때문에 비롯된 측면이 있다.
순조연간의 김조순부터 고종 즉위년 까지의 약 60여년에 걸쳐 장동 김씨들은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가지고 국정을 농단하였다.
안동김씨는 구 안동김씨와, 신 안동 김씨로 나뉘는데 이들은 관향(貫鄕)이 같다 뿐이지 , 始祖도 다르고 혈연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으며, 이들 신구 안동김씨끼리 혼인하는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등 전혀 다른 성씨이다. 구안동김씨는
신안동김씨 인구의 약 10배로서 안동 김씨중 구 안동김씨가 절대 다수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로 잘알려진 병자호란기의 척화신의 대표격인 청음
김상헌이 신안동김문이 배출한 대표적 인물이며 청음이후 가세가 크게 흥하여 , 세도정치를 구가한 안동김씨들은 청음의 직계 자손들이다.청음의 자손들이 대대로 장동(장의동, 현재의 청운동, 옥인동일대)에 살았기 때문에 이들을 장동 김씨(장김)라고 칭하게 되었으며 이들이야말로 조선조의 대표적 벌열(閥閱)가문이다 , 장김은 본관은 안동이지만 15세기말 16세기초부터 서울에
거주하여온 경화사족(京華士族)으로 전형적인 서울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舊안동김씨는 先 안동김씨라고도 하며, 麗蒙연합군의 일본 침공시 고려측 지휘관 김방경이 중시조 이며, 조선조에서 현달한 인물로는 진주성 싸움의 김시민 장군, 광해군때의 김응하 장군, 사육신을 고자질한 김질 , 인조때의 친청파 김자점, 그리고 근래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대표적이다.
구안동 김씨들은 자신들과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장김(신안동김씨)에 의한 세도가 단지 관향이 같다는 이유로 세도정치 가문으로 오해 받는 것을 황당해 한다.
구안동씨는 대부분의 영남의 남인들이 그러하듯이 숙종조 이후 중앙정치 무대에서 사라지고
춥고 배고픈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벌열(閥閱)가문인 장동김씨는 영남 사람인가?
신안동김씨는 그 관향에서 알수 있듯이 시조때부터 안동에 世居 하였다. 현재 신안동김씨의 주요한 세거지인 안동시 풍산면 소산(素山)에 자리 잡은 것은 약 1430년 전후로 보인다.
신안동김씨중 장동김씨파의 시조는 김번이라는 인물이며 청음의 증조부 이다. 김번은 그의
형인 김영에 이어 과거에 급제(1513년 중종 8년)하면서 고향인 안동 소산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 김영은 청풍계(靑風溪), 김번(서윤공)은 壯義洞(壯洞)에 자리 잡게
된 연유로 김번으로부터 시작되는 신안동김씨 서윤공파를 장동김씨라고 부르게 되는것이다.
장동김씨는 김번의 증손자인 청음 김 상헌 (1570-1652)때부터 크게 현달(顯達)하여 장동 김문에 금관자가 서말이라고 인구에 회자되는등 조선을 대표하는 벌열가문으로 성장하게 된다. 청음과 그 형인 仙源 金尙容은 병자호란 당시의 대표적인 忠節臣이며, 이중 청음의 자손들이 더욱더 번성하게 되는데, 손자인 김수흥(1629-1689) 김수항, 증손자들인 金昌輯1648-1722), 金昌協등의 6형제인 6昌은 노론의 거두들이다. 장김 세도정치의 태두가 되는 순조의 장인 金祖淳(1765-1832)은 靑陰의 7세손이며, 세도 정치기의 척신 김좌근, 김문근등은 8세손 ,김병기, 김병학등은 9세손이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장동 김문은 그 중시조 서윤공 김번이 서울로 이주해 왔는데 안동 소산에는 그가 거주하던 淸遠褸 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청음 김상헌 및 그손자 김수항 代 까지는 안동 소산리에 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음은 병자호란을 전후해 2차례 안동에 낙향해서 우거 했으며, 청음의 손자 김수증,수항 형제가 청원루에서 독서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안동과의 관계는 일정기간 유지가 되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서울과 양주목(남양주) 일대를 (특히 석실서원일대) 기반으로 하는 서울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또한 장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1800년은 이 가문이 안동에서 入京한지 280여년이 경과된 시점이기에 세도정치를 행한 장동김문은 대표적 京華士族이라고 볼수 있다
.
500년전에 안동에서 상경한 이 가문을 경상도 사람이라고 한다면, 약 500년전에 낙향하여
상주 낙동에 세거한 필자의 집안도 서울 사람이라고 우겨도 되는 논리의 비약이 발생한다.
현재 풍산면 소산리에는 신안동김씨들이(소산파) 세거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장동김씨의 派祖인 김번의 형인 김영의 후손들이다.
결론적으로 세도 정치를 행한 신 안동김의 일파인 장동김씨들은 서울에 근거를 둔 京華士族들이며, 노론의 대표적 가문이다. 한편 영남은 남인의 근거지이며 안동을 비롯한 영남의
선비들은 노론을 대표하는 장동 김씨들과는 정치적 원한이 깊은 관계라고 할수 있다.
또한 혈연적으로 아무 관련도 없는 구안동김씨는 (경상도에 거주하는 안동김씨는 대부분 구안동김씨임)안동김씨 세도 정치와는 아무관계도 없으며, 남인으로서 당연히 노론의 壯金과는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것이다.
안동 소산리에 세거한 신안동 김씨 가문은 (소산파) 派祖 김영이 , 장동김문의 派祖 김번과 형제 지간으로 장동 김문과는 아주 먼 일가뻘이 된다고 하겠다. 다만 이들 소산파 신안동김씨는 경상도에서 아주 소수파이고 이미 500년전에 장동김과는 派가 갈린 집안이기 때문에 ,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경상도 사람들과 관련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조선후기 소외된 지역 영남
선조이후 조선 중후기의 정치사는 당쟁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물론 그이전에도
사림과 훈구의 대립등 정파적 대립이 있었으나, 이는 어느 사회에나 있는 기득권세력과 신진 세력들과의 대립이며, 사색당쟁으로 특징 지어지는 조선 후기의 당쟁과는 차이가 있다 하겠다.
당쟁의 원인을 설명하는 학설은 조선시대 당대의 성호 이익의 학설부터 일제 식민사관에
근거한 일본학자들의 입장, 최근의 이론까지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본질은 관직의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이며, 정권을 잡기 위해 정쟁을 하는데 있어서 칼대신 붓으로 했으며, 붓으로 싸움을 하기 위해서는 왕조의 이념인 주자학적인 관념론을 근거로 정쟁을 해 왔다는라는 것이 다른 나라와 다른 특색이라고 하겠다.또한 조선 후기의 당쟁은 싸움에서 패하면 정권내지 관직만 잃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하는 일까지 비일 비재
했으며, 이것이 목숨을 걸고 상대를 공격하게 되는 원인었던 것이다. 상대당은 단순히 정적이 아니라 원수로 여기게 되었으며, 심지어 당파끼리 복색 및 풍습도 달리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어릴적에 “ 노론은 우리와 치마 입는법이 다르다” “노론은 문하배(門下拜-문밖에서 절하는 것) 를 하지 않는다”, 아! 그집이 우리와 혼인 할만 한데 노론이라서 혼인을 하기가
망설여 진다” 등의 애기를 자주 들었다. 이는 당파가 다르면 옷입는 법도 다르고 통혼도 하지 않는다는 당쟁의 여파가 희미하기는 하나 1960년대에도 여전히 잔재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쟁에 대해서 장광설을 하는 것은 사색 당파를 애기 하지 않고서는 조선후기 정치에 있어서
지역구도를 설명할 수가 없고 따라서 영남이라는 지역도 설명이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당쟁은 선조 연간에 사림이 동서로 분열되었고 동인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에 송강 정철의 치죄 문제로 대 서인 강경파는 북인, 온건파는 남인으로 분화 된다.서인은 이로부터 약 100년후인 1694년에 송시열과 소장파의 신망을 받는 명제 윤증의 불화 및 김익훈의 치죄 문제로 서인 내부에 이론이 생기면서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 하게 된다.
조선 당쟁의 또 하나의 특색은 주자학 이론을 가지고 치열하게 대립 했으므로 학통이 곧 당파가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동인은 영남 학파로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후학들이 주류이며 남인은 퇴계학파, 북인은 남명 학파이다.. 남북인 모두 영남이 지역적 기반이며 남인은 경상 좌도, 북인은 합천, 산청, 진주등 경상우도에 보다 강한 지역적 기반을 가진다..
서인은 기호 학파이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학문적 연원으로 하고,이를 잇는 사계 김장생의 제자들로 구성된다. 노소론 분열기에 있어서, 우암 송시열을 추종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노론이 형성되었고, 명제 윤증, 남계 박세채를 학문 및 정치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소론을 형성하게 되었다. 서인(노 소론 포함)은의 지역적 기반은 기호 지방으로서 서울 경기 충청권이다.
당쟁의 역사를 집권한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대별 할수 있다.
선조 연간 : 당쟁 생성기.동서인 어느 정파도 완벽한 우위를 점하지 못함
정여립의 난 이후에는 서인이 우세. 임란 이후에는 동인이 우세
선조말-광해군 : 동인 집권기. 특히 광해군 시기에는 북인이 정권을 장악함
인조-효종 : 인조 반정이후 조선말까지 서인이 절대 우세한 구도로 전개.
인조 –효종기는 서인 정권이며 . 남인은 소수파 및 야당임
현종 : 예송논쟁으로 서인과 남인간 당쟁 격화. 현종말 남인 집권
숙종 : 서남 당쟁의 격화시기. 서인과 남인간 정권이 교체되는 환국이 3차례 일어남
갑술환국(1694)이후 남인은 영원히 정권을 잡지 못함
경종 : 노론과 소론간의 당쟁이 치열. 소론이 우위
영조 ; 노론과 소론간의 탕평기, 노론우위. 이인좌의 난등의 영향으로 영남은
벼슬길에서 소외됨
정조 : 영조때의 탕평기조지속. 남인 일부 등용
순조-철종 : 안동 김씨 세도 정치. 노론 일당 독재
대체로 조선조의 당쟁은 선조때의 동서인 대립 구도에서 광해군때의 북인 정권기를
제외하면 서인의 절대적 우세로서 전개 되었으며 여당인 서인과 야당인 남인간의 대립으로
설명이 된다. 숙종 말기 노소론 분당이후에는 노론 우위및 소론이 야당 구실을 하는
구도로 전개가 되었고 순조때 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노론 일당 독재였으며, 이것이 조선조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즉 견제 세력이 없어진 노론이 정권을 농단하며, 부패가 심화 되었으며, 외부의 변화에 눈을 감고, 기득권 사수에 골몰했던것이 망국의 한 원인 이었던 것이다
서남 당쟁(서인과 남인)에서 패배한 남인은 1694년 갑술 환국이후 조선이 망할때까지
영원히 정권을 잡지 못하는 만년 야당의 존재에 불과 했다. 특히 1728년 이 인좌의
난 이후 영남은 반역향으로 낙인찍혀 , 벼슬길이 철저히 차단 되었다.
물론 정조때의 채 제공, 정약용등이 요직에 등용이 되었지만 이들은 근기(近畿)남인들로서
서울및 경기도에 기반한 사람들이며, 영남사람은 아닌것이다
결론적으로 남인이 몰락한 1694년을 기점으로 영남인들은 중앙 정계에서 대체로 소외 되었으며, 정계 진출의 길이 막힌
영남인들은 서원등을 중심으로 주자학에 몰두하며, 향리에 은거했던 것이다. 이것이 영남에 고택이 많고, 비교적 유교 문화가
잘 보존된 원인이다
한편 북인은 인조 반정 이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어 완전히 소멸된 정파 이다.
따라서 북인의 기반인 서부 경남일대가 정권에서 소외된것은 말할것도 없다.
인조 반정은 서인세력이 북인을 몰아낸 정변이며, 이 이후 조선이 망할때까지 몇번의
경우를 제외하곤 서인(노소론 분당이후에는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영남 만인소 사건
역사학자 이덕일과 이성무의 저작을 인용 및 요약하여 무신창의록과 영남만인소 사건을 소개해 보겠다.
갑술환국이후 정계에서 밀려난 영남 남인들에게 남인의 영수 번암 채제공이 정조 12년(1788년 )우의정에 제수된것은 정치적
재기의 희망을 준 사건 이었다.
정조는 즉위이후에 노론의 일방적 정국 주도를 타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 하였고, 즉위 12년만에 남인을 등용한 것은 정권이
여전히 노론(벽파)의 수중에 있지만 , 어느정도 왕권이 회복 되었슴을 의미한다. 채제공의 등용에서 희망을 얻은 영남의 남인들은 이 인좌의 난때 영남이 반역향으로 찍힌것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무신창의록을 정조에게 올린다.
이인좌의 난이란, 1728년 영조의 경종 독살설등 영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충청, 경상 호남의 소론및 남인 일부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킨 일인데, 한때 청주성을 함락하는등 제법 기세를 올렸던 영조시대의 가장 큰 반란 사건이다.
특히 갑술환국이후 중앙정치에서 소외 되었던 남인들의 호응이 컸으며 , 인조 반정이후 역향으로 낙인찍혀 벼슬길이 막혀 있던
경상우도의(남명학파들의 지역기반) 불만이 적극적인 반란 참여로 표출 되었다.
이 같은 연유에서 무신란 진압이후 영남전체가 반역향으로 낙인 찍혀 벼슬길이 봉쇄 되게 된다. 난을 진압한 이후 조정에서
대구 감영에 세웠던 平嶺南碑가 이와 같은 사정을 설명하여 주고 있다.
무신 창의록은 이인좌의 난(무신란)때 , 이인좌 군에 저항한 영남 사대부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인데 , 영남 사대부 모두가 반란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 안동을 비롯한 13개 고을은 반란군에 맞서 싸웠다는 것을 주장하는 내용 이었다 .
이들은 정조 12년(1788) 이 책자를 올려 영남이 반역향이 아니란 판정을 받고 자신들을 신원하려 했다. 당시 영남의 유생들은
벼슬이 없는 幼學의 신분으로서, 이들이 상소를 승정원에 봉입하기 위해서는 성균관 장의의
동의를 얻는 근실이라는 절차를 거쳐야 했는데, 당시 성균관 및 승정원은 노론에 의해 장악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근실을 받을수 없었다. 1788년 8월에 도착한 이들은 근실을 받지 못해 상소문을 봉입하지 못하다가 그해 11월 경희궁으로 거동하던 정조가 종로 상인들을 만나는 틈을 타 상소문을 올리는데 성공한다. 다시 말하면 노론이 장악한 성균관과 승정원을 통과 해지 못해
상소문 접수에 3개월이 걸릴 만큼 영남인들은 힘이 없었던 것이다.
정조는 疏頭 이진동을 접견하고 “근래에는 조정에서 영남을 거의 다른나라 사람 처럼 보니 진실로 개탄 스럽다. 인재가 부족한 이때에 영남사람들 중에도 반드시 등용할만한 사람이 많을 터이니…”라고 돈유하며 사실상 영남 사람들을 등용할 것을
시사 한다.
영남 남인들을 정치적 우군으로 활용하려했던 정조는 무신창의록 사건이후 4년이 지난 정조 16년(1794년)에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베풀어 영남사람 두사람을 합격 시켰는데, 이때 응시한 영남의 선비가 7000명이 넘었고, 구경꾼 까지 합치면 일만이상의 대 군중이 운집 했다고 한다. 이는 영남 일원의 선비 전원이 도산서원에 운집했다고 볼수 있다. 겨우 두명을 합격시켰던 것이
당시에는 일대 사건이었을 만큼 갑술 환국 이후 영남은 철저히 벼슬에서 소외되었던 것이다.
필자가 도산서원에서 확인해보니 科場이라는 팻말이 있는데, 물결이 출렁이는 강 바로 옆이라 의아 했는데, 과거에는
이 지역이 백사장이라 일만 이상의 인파가 운집하는 것이 가능했으나 , 안동댐 때문에 당시 과거 시험장은 수몰이 되었다고 한다.
별시로 인해 더욱 자신감을 갖게된 영남 유림은 정치적 재기를 위해서 유명한 영남만인소 (萬人疏)를 작성하게 된다.
이것이 유명한 1차.2차 영남 만인소 사건이며 실제 서명한 영남의 선비가 각각 일만인을 넘는 대사건이다. 만인소의 주 내용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살피고, 사도 세자를 신원하라는 것이엇는데,사도 세자 죽음에 이르게한 집권당인 노론 벽파를 몰아내고
남인이 재 집권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아버지를 신원하고, 노론벽파를 견제하려는 정조의 정치적 목적이 일치하여 성사된
일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영남의 선비 거의 전원이라고 보여지는 만명 이상이 실제 서명 했는데 이들중 아무도 벼슬이 없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즉 상소가 접수 되기 위해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근실을 받아야 하는데 벼슬길이 차단 당했던 영남 남인들은 거의 전원 幼學이어서 노론이 장악하고 있던 성균관의 근실을 받을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승정원을 통과하여 임금에게 상소문이
전달되는 길이 요원 했던 것이다. (근실은 노론이 영남 남인들이임금에게 상소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한 제도임)
疏頭 이우등은 고심끝에 전직 교리인 이 한동으로 하여금 상소케 하여 영남 만인소는 정조에게 전달 되게 되었다. 전 현직 관료의 상소는 진신소라고 하여 근실의 과정이 필요 없는 것을 이용해 상소문 봉입에 성공한 것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고 그결과 노론 벽파를 역적으로 모는 이들의 상소에 큰 감명을 받고 남인을 정치적 우군으로
삼았으나, 대대로 정권을 담당해온 노론 벽파를 몰아내지는 못한다. 영남 유생이 만명이라고 해봐야 벼슬아치라고는
정 5품 교리정도가 한 두명 있었을 뿐이니, 정조가 이들을 의지하여 노론과 상대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정조가 이들에게 해줄수 있는 것은 위로의 말과 영남을 신뢰하니 기다리라는 말이었고, 소두 이우를 경종의 릉인 의릉 참봉으로 삼았는데, 이는 직급을
떠나 영남 만인소에 정당성을 부여한 조치 였다.
사도 세자 사건에 대한 실제적인 조치가 없자, 영남 유생들은 이를 거론하며, 11,055명이 서명한 2차 만인소를 올리지만,
노론벽파의 힘을 무시하지 못했던 정조는 신중론으로 일관하여 노론 벽파를 역모로 모는등의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
규장각 각신을 등용하여 신진 관료를 키우고,수원 화성을 건설하는등 왕권을 강화하고, 영남 남인을 등용하기 시작하는등
개혁 정치를 펴던 정조는 뜻하지 않게 재위 25년만인 1800년 40대의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어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순조대에는 노론인 정순대비의 수렴청정과 역시 노론인 순조의 장인 김조순으로부터 안동김씨
세도 정치가 시작되어 , 이후의 정치 지도는 노론의 일당 독재가 지속된다. 정조의 죽음으로 영남남인의 정치적 재기는
물건너간 것이었다
맺는말
갑술환국(1694년)이후 정계에서 소외된 영남의 남인들은 영조때 의 무신란(1728)이후 환로( 宦路)에서 더욱더 멀어지며 ,
정조 재위시 부활의 움직임이 있엇으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하고, 순조 이후는 더더욱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밀려 향리에 우거 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정확한 근거는 없으나 필자가 아는 범위내에서는 영남에
정승이 출현 한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후에 대원군 시절로서 낙동대신 유후조가 1867년 좌의정이 된 것이 일대 사건이었다..
(유 후조 : 상주인. 류성룡의 후예이자, 전 대통령 실장 류 우익의 선조)
영남 각 문중은 선조, 광해군 대 까지는 꽤 현달한 인물이 많았으나 , 이후에는 관직에 오른 사람이 매우 드물며, 벼슬아치가
있다해도 주로 지방직 위주이며 또는 京職이라고 해도 실권이 있는 청요직 및 고위직을 지낸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안동을 비롯해서 춥고 배고팠던 영남인들이 양반 신분을 유지 하게 되는 것은 바로 봉제사, 접빈객이다.
원래 3-4대가 연속 벼슬을 하지 못하면 사대부가 아니라고 하나,벼슬이 드물었던 영남에서는 봉제사, 접빈객을 잘하고,
향리에 묻혀서 학문을 연구하는 것을 양반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서 영남을 제외한 호남, 이북 지역, 강원지역등은 어떠 했을까.
서북으로 대표되는 이북에 대한 차별은 영남에 비할바 아니며, 호남, 강원 역시 영남과 같은 사정이라고 보여진다. 비교적 탕평이 되었고 개혁 정치기 였던 정조때에도 인재는 서울 경기 충청위주, 즉 서인 위주로 등용되고 나머지 지방 사람들은 소외 되었는데 ,이 같은 사정을 설명해 주는 다산 정약용의 통색의를 인용하며 장광설을 맺는다
통 색 의(通 塞 議)
(한영우(韓永愚 번역)
臣(정약용)이 삼가 생각하옵건대, 인재(人材)를 얻기 어렵게 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온 나라의 영재(英材)들 가운데서 발탁(拔擢)을 해도 오히려 부족함이 있겠거늘, 하물며 영재의 8~9할을 버리고서야 어찌 인재를 얻겠으며, 온 나라의 생령(生靈)들을 육성(育成)시켜도 오히려 인재가 나타날 둥 말 둥한데, 하물며 백성의 8~9할을 내버리고서야 어찌 인재가 나타나겠습니까.
소민(小民)이라 하여 등용(登用)하지 아니하고, 중인(中人)이라 하여 등용하지 아니하고, 관서(關西)․관북(關北)지방사람이라 하여 등용하지아니하고, 해서(海西)․개성(開城)․강화도(江華島) 사람이라 하여 등용하지 아니하고, 관동(關東)사람과 호남(湖南)사람의 반(半)을 등용하지 아니하고, 서얼(庶孼)이라 하여 등용하지 아니하고,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은 등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면서도 등용하지 않음과 같습니다. 등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수십 가구(數十家口)의 문벌(門閥) 좋은 사람들 뿐이 온데, 그 가운데에는 어떠한 사건(事件)에 연루(連累)되어 등용될 수 없는 사람들이 또한 많습니다. (이하 생략)
참고 문헌 :
이성무 : 조선시대 당쟁사 권1.2
이덕일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기타 , 이덕일의 저작 및 신구 안동김씨 세보, 안동김씨 세도정치 관련 논문 등
상기 소고는 논문이 아닌고로 일일이 전거는 밝히지 않았으나 대략 위와 같은 저서, 논문을
인용 및 참고 하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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