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맺어준 귀한 인연으로 아내를 만나 38년 동안 가정을 이루어 아이 둘을 키웠고
그 아이들도 어느덧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 사이 양가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새 생명이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고 았다.세월은 살과 같이 빠르게 흘러 우리 부부도 어느새 초로의 늙은이가 되었다.
흐르는 세월을 잡을 수는 없지만 지나가는 시간을 기억 속에 갈무리하여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행만한 것이 없다.
결혼 38주년 기념 여행을 어디로 갈까?
진주 구례 하동을 엮어 맛과 매화 기행을 갈까? 아니면 해남으로 가서 달마고도를
한 바퀴 도는 트레킹을 할까를 고민하다가 아내가 이미 봄기운이 완연한 땅끝 해남으로
2박 3일 여행을 가자고 결정했다.
3월 10일 첫날은 윤선도 고택인 녹우당을 들려 옛 문인의 자취를 둘러보고,
둘째 날은 달마고도 18km를 트래킹 하며 마지막 날은 대흥사에 들러 조선 후기 명필들이
쓴 편액들을 감상해 보기로 했다.
숙소는 땅끝 마을에 잡았다.
첫날 녹우당(綠雨堂) -2023년 3월 10일
땅끝 해남은 서울 기준으로 육로로는 가장 먼 곳이다. 3.10일 아침 10시 20분경 여의도를
떠나 녹우당에 도착하니 오후 4시 반경이었으니 6시간이 걸린 셈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녹우당은 물론 유물 전시관마저 수리 중이라 문을 닫았다.
2013년 8월에도 수리중이라 문을 닫아 발길을 돌려야 했으니 아무래도 나는 녹우당과는
인연이 없나 보다.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고택으로 유명하지만 이 집은 고산의 고조부인
어초은 윤효정(漁憔隱 尹孝貞)으로 부터 내려온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의 종택이다.
또한 이 가문을 빛낸 공재 윤두서는 고산의 증손자다.다산 정약용은 외가가 해남 윤씨로서
공재의 외증손자이다. 이처럼 녹우당은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는데 조상의 신주를 불태워
천주교 박해를 초래한 윤지충 바오로도 고산의 6대손, 공재의 증손자다.
윤지충이나 이 집 안의 외손인 정약종, 정하상 바오르 등 다산 집안이
(다산이 카톨릭 신자라는 것은 논란이 있지만) 카톨릭을 받아들인 것은 이들이
정조 사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남인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윤효정은 당시 해남의 부호였던 해남정씨 정호장의 사위가 되는데
처가의 재산을 받아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 가문의 대종손의
경우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노비는 500-600구, 토지는 1000-2300 두락
(두락=마지기, 즉 20-46만평)에 이르렀다고 하니 지역의 대 부호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때 까지도 여자도 재산을 남자와 같이 상속 받았으며,따라서 윤효정의 부인도
親堂의 재산을 온전히 받을수 있었다.
녹우당과 기념관이 문을 닫았으니, 우리는 공원화된 녹우당 일원만 둘러보고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부사시사를 새긴 詩碑를 읽으며 옛날 고교때 고문시간을
생각하며 추억에 잠기기도 했고 오우가를 읊조리기도 했다.
어초은 사당과 제각(祭閣)인 추원당, 고산 사당을 보고 녹우당 담벼락을 따라 일원을
산책해 보니 뒤로는 덕음산을 두고 앞과 오른쪽으로도 낮은 산이 들판을 감싸고 있어
풍수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이 집이 앉은자리가 명당임을 절로 알겠고, 집의
규모 역시 과거 이 가문의 경제력을 짐작케 해 준다
윤선도 하면 고교때 배운 어부사시사와 오우가가 포함된 산중산곡을 지은 조선의 대표적인
시조 시인으로 추앙하지만, 당대의 논객으로 1차 예송논쟁 때 노론의 송시열에 맞서는 남인의
맹장으로도 당쟁사에도 이름이 높다.
녹우당은 현재 비공개라 사전에 신청을 해야만 볼수 있지만 유물 전시관은 입장료
2000원을 내면 볼수 있는데 이번에도 수리 중이라 보지 못해 아쉽지 그지없다.
내가 이번에는 옥동 이서(玉洞 李溆)가 쓴 녹우당 편액을 감상하고
상시 전시하지는 않겠지만 운이 닿으면 공재의 자화상 그리고 공재의 손자 윤용이
그렸다는 설이 있는 미인도를 간절히 보고 싶었고 그 외 윤선도의 산중신곡 유고, 윤두서의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채애도(採艾圖) ,짚신 삼기 등 그림들을 일부라도 보고 싶었다.
유홍준이 문화유산 답사기에 ' 유물 전시관에도 진품은 전시하지 않고
사진만 전시해 놓았다"고 욕을 바가지로 해 놓았는데, 문을 열었어도 진품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해남이 고향인 친한 선배는 국가에서 예산을 받아 운영하면서 녹우당은
잘 개방하지 않으니 고약하다고 늘 비판적이다.
녹우당이라는 당호는 윤두서의 절친이자 성호 이익의 형인 동국진체의 명필 이서가 짓고
현판을 썼는데, 綠雨는 만물이 생장하는 봄에 내리는 비를 뜻한다. 또는 바람이 불면 고택 앞의
은행나무잎이 비처럼 떨어진다고 해서 녹우라는 당호가 유래했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녹우당과 유물 전시관을 보지는 못했지만 종택의 담벼락을 따라 여기저기 피어난 매화를
감상하고 인근의 차밭을 지나며 완연한 봄기운을 느끼며 녹우당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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