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국내여행

23년 초봄 해남여행(3.12일 대흥사 글씨 감상)

낙산유정 2023. 3. 25. 18:59

도솔암 자락길을 걸은 후 바로 대흥사로 갔다. 날이 사나워져 간간이 비가 흩뿌리고 
강풍에 우산을 펴기조차 힘든 때가 있었다.
이번에 대흥사를 찾은 목적은 이 절에 걸려 있는 조선 후기 명필들의 글씨를 감상하기
위해서다. 10년전 아내와 함께 왔을 때는 일행들이 있어 가련봉등 두륜산을 등산하고
하산길에 대흥사를  바쁘게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시간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글씨를 감상하고자 했으나 강풍이 불고 기온이 급 강하하여 이번에도 서둘러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대흥사는 서예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명필들의 글씨가 줄비하다.
대웅보전 편액 글씨에 얽힌 추사와 원교의 전설 같은 일화나 추사나 창암의
일화는 유홍준이 소개한 이후 워낙 유명해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대흥사에는 동국진체의 원교 이광사,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 위당 신관호 등 조선 후기의 명필들과, 한말-일제 강점기의 해사 김성근,
성당 김돈희 , 현대의 서예가 여초 김응현, 운암 조용민, 강암 송성용 등
당대의 명필들이 쓴 현판들이 즐비하다. 거기에 정조대왕의 어필로 된 사액
현판까지 있으니 대흥사야 말로 서예의 보고라고 할만하다.
두륜산은 원래 이름이 우리말로 한듬 한자로는 大芚山이었다가 백두산과 중국의
곤륜산에서 한자씩 따라가 頭崙山으로 바뀌었고 절이름도  한듬절 즉  大芚寺였는데
일제 때 산은  頭輪山 절은 大興寺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주문 글씨.

절로 들어가는 산책로를 지나 일주문부터 글씨를 감상하며 걸었다
대흥사에는 특이하게도 일주문이 두 개 있다. 
첫 번째 일주문은 頭崙山 大芚寺이다. 대흥사가 아니라 절의 원래 이름인 대둔사라고 썼는데
이왕 옛 이름을 찾는 김에 산이름도 한듬(큰 언덕)이라는 고유지명을 찾기 위해 大芚山라고
썼으면 좋았을 것이다(頭輪山이라고 쓰지 않고 輪을 崙자로 고쳐 頭崙山이라고 써서 그나마
頭輪山이라고 한 것을 되돌려 놓긴 했다)
두 번째 일주문은 頭輪山이라고 되어있다.
현판 글씨는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1913-1999)이 썼고 93년에 걸었다고 한다.
2022년 겨울 전주 여행 시 강암 서예관을 방문하여 그의 글씨뿐 아니라 인품을 존경하게 되었다.
토함산 석굴암, 전주시 관문인 호남제일관, 내장산 내장사 현판도 강암의 글씨다.

일주문 , 강암 송성용의 글씨

연하문

일주문 뒤편에는 연하문(煙霞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안개와 노을이라는 원래의 뜻 이외에
어떤 불교적인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연자가 멋있는대  煙의 古字라고 한다. 누구 글씨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煙霞門

두 번째 일주문 글씨.

 

여초 김응현(如初 金譍顯)이 쓴 두 번째 일주문 두륜산대흥사.
여초는 추사이후  여초라고 할 정도로  20세기의 대표적 서예가로 전국의 수많은  절집에 그의
글씨가 걸려 있다.
김천 직지사, 낙산사 보타전, 경복궁 강녕전, 김천의 영남제일문등이 그의 글씨다.
여초의 형인 일중 김충현도 유명한 서예가인데 능가산 내소사, 우리 집안 종택인 상주 양진당
현판 글씨를 썼다.

여초 김응현이 쓴 일주문 글씨

禪林敎海滿華道場.

선종이 숲을 이루고 교종이 바다를 메우니 모두가 어우러진 도장이라는 뜻.
두 번째 일주문 뒤의 현판이다
글씨는 행서와 초서의 명필인 곡성 출신 雲菴 趙鏞敏이 썼다.백양사 일주문도 이분 글씨다

 

두륜산 대흥사 해탈문.

아래 사진 위편의 두륜산대흥사는 한말의 명필 海士 金聲根(1835-1919) 글씨고 그 밑의 해탈문은
원교 이광사(員喬 李匡師  1705-1777)가 썼다
원교는 완도에 15년간 유배되어 생을 마감했는데 이로 인해 전라도의 사찰에는 원교 글씨가 많다.
내가 직접 본 것만 해도 대흥사의 대웅전과 침계루, 내소사 대웅전,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 강진 백련사
대웅전과 만경루등 상당히 많다.대흥사 해탈문 글씨가 해사 김성근이 썼다고 BLOG에 많이 소개돼 있는데
해탈문 위의 두륜산 대흥사 글씨가 해사가 쓴 것이다.

(위 두사진) 김성근의 두륜산 대흥사 글씨와 이광사가 쓴 해탈문 편액

범종루(梵鐘樓)

해탈문을 지나면 범종루가 나온다. 필획이 웅혼하고 화화미(繪畵美)가 있어 한참을 감상했다. 낙관을 보니
여초 김응현 글씨다. 

범종루

표충사 권역.

 
정조대왕의 명으로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려 세운 사당이 표충사(表忠祠)다. 10년 전에 대흥사에 왔을 때 가보지
못해, 이번에는 표충사부터 들렸다
표충사는 정조대왕의 친필 글씨를 사액한 것이고 임금의 글씨가 있는 건물이라는 뜻의 어서각은 위당 신관호의 
글씨다. 이외 호국문 예제문 글씨가 볼만하다

표충사

 

(위) 예제문과 호국문

대광명전 구역.

 

大光明展을 중심으로 東國禪院 벽안당이 있다. 대광명전은 초의선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추사의 방면을 기도하기 위해 당시 전라수사로 있던 추사의 제자 위당 신관호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고 한다. 이 구역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선원 구역이라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대흥사에 문의해보니 대광명전 현판은 위당 신관호가 썼다
대광명전은 수리 중이라 접근이 가능해 현판 글씨를 가까이서 보았으나 추사가 쓴 동국선원 편액은
멀리서 줌으로 잡았다.

(위) 대광명전과 추사가 쓴 동국선원

남원구역의 글씨.

 

대흥사는 크게 보아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과 천불전을 중심으로 한 남원, 그리고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대웅전이 중심이 아니라 북원에 있어 대웅전 건립 이후
절이 점차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원에서는 창암 이삼만이 쓴 가허루 편액과 원교 이광사의 천불전, 성당 김돈의의 용화당 편액을
감상했다.

(위) 鴐虛樓. 대흥사 남원, 천불전의 출입문 역할을 하는 문인데, 다락집이 아닌데 다락樓를 썼다. 휘어진 나무 문지방이
땅에서 떨어져 있어 다락집으로 보고  樓자를 썼다고 한다. 창암 이삼만의 글씨다.
鴐는 소멍에 가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허의 불교적 의미를 모르겠다.
가허루를 통과하면 좌우로 용화당과 봉향각이 있고 정면에 천불전이 보인다. 천불전 뒤 축대 언덕에 자리한
요사체가 일로향실(一爐香室)이다. 추사가 제주 유배 시에 해마다 차를 보내준 초의선사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편액 글씨를 써서 제자인 허소치 편에 보냈다는 그 유명한 일로향실(一爐香室)편액이 걸려 있지만 , 출입금지된
구역이라 들어가 보지 못해 몹시 아쉬웠다.

(위) 천불전. 이광사 글씨다. 천불을 경주에서 조성하여 1817년 두대의 배로 해남으로 운송 도중 표류하여 일본 규슈로
갔다가 돌아와 1818년 봉안하였다고 한다

성당 김돈희(金敦熙)가 쓴 용화당 龍華堂 현판. 용화당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체다

 
원교의 대웅보전과 추사의  무량수각.
 
마지막으로 절의 중심지인 북원구역의 글씨들을  관람하였다.
원교의 대웅보전 편액과 요사체인 백설당에 걸린  추사의 글씨 무량수각에 얽힌
그 유명한 일화를 생각해 보았다. 추사는 원교를 조선의 글씨를 망친
사람이라고 혹평하고 제주도 유배길에 대흥사에 들려 초의에게 원교의
대웅보전 편액을 떼라고 했다.
유배를 마치고 대흥사에 다시 들린 추사는 초의에게 '내가 전에
잘못 보았다'라고 하면서 원교의 편액을 다시 걸라고 했다고 한다. 편액을 뗐다
다시 걸었다는 것은 고증이 안되는 일이나 추사가 원교나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혹평한 것은 사실이다. 유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추사가 원교와 창암을 재평가 한 것은 추사라는 사람이 역경을 겪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인격이 원숙해지고 남을 인정하는 관대함이 갖추어지지 않았나 하고
내 나름대로 추측을 해 보았다.원교는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의 부친인데
23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원교와 추사는 장기간 유배 생활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고
유배 생활이라는 역경을 딛고 두분의 글씨가 더욱 발전하지 않았냐고 나름대로
추측을 해 보았다.
북원구역을 끝으로 대흥사 명필기행을 마쳤다. 절 앞에서 점심을 먹고  머나먼
귀경길을 서둘러야겠기에 응진전 산신각 명부전 청운당은 
주마간산 격으로 지나갔고 응진전 앞 삼층석탑도 자세히 보지 못한 점이 아쉽다.
우리 민족의 유산인 훌륭한 글씨를 잘 보존해 준 대흥사가 고맙다.
 

(위) 원교 이광사의 글씨 枕溪樓. 절 입구의 해탈문 함께 내가 좋아하는 원교의 글씨다.
필획이 물 흐르는 것처럼 유려하다

(위) 같은 건물의 침계루 맞은편에 있는 원종대가람.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위) 원교의 대웅보전 편액. 화강암처럼 骨氣가 서려 빳빳한 느낌을 받는다고 평가를 받는다. 

(위) 추사가 쓴 무량수각 편액. 필획이 기름지고 회화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평가를 받는다. 원교의 대웅보전과
대비되는 이미지다. 백설당이란 요사체에 걸려 있다.

(위) 구한말의 명필 해사 김성근이 쓴 백설당 편액. 무량수각과 같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