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2018.1.20 소주 여행(한산사 답사.2018 1월20일)

낙산유정 2018. 1. 26. 16:30

상해 출장중 주말에 짬을 내어 1.20/토 당일 소주 관광을 다녀왔다.당일 여행이기 때문에 장계의 풍교야박이라는
한시의 배경으로 유명한 한산사와 중국 4대 정원이라는 拙政園 두곳을 깊이 보는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소주는 상해에서
고속철로 30분거리다 . 한산사 관광은 楓橋風景名勝區와 寒山寺를 각각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사실 두곳 모두
8세기 唐詩인 楓橋夜泊이라는 시와 연관된 관광이다.1.21일 상해 홍교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산사 답사기를
적어 보았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태어나기는 소주에서(生在蘇州)라고 할정도로 소주는
운하와 호수 정원이 아름다운 풍광이 좋은 곳이다.0930경 소주역에 내리자마자 관광안내소에 들려 지도 한장 얻어가지고 한산사로
달려가니 1030경이었다.어머니가 즐겨 암송하시는 한시 풍교야박에 나오는 풍교와 한산사를 둘러보고 엣 시인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기도 하고
올해 97세인 어머니께서 70대때 소주 관광을 하셨지만 한산사를 못가보신데 대해 지금도 몹시 아쉬워 하시는데, 아들인 내가 대신
가보고 한산사와 풍교에 대한 얘기를 해 드리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한산사와 한시 풍교야박에 관련된 중앙일보 여행기사를 스크랩해두고 가끔 보시는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곤 하셨다.
옛시를 암송하며 시에 나오는 풍교와 객선이 정박했던 운하, 한산사를 둘러보는것이 이곳을 제대로 보는것이다.


楓橋夜泊,   張繼
月落烏啼霜滿天(달지자 까마귀 울고 하늘엔 서리 가득한데)
江楓漁火對愁眠(강가 단풍 고깃배 등불 마주 보고 시름겨워 잠못 이루네)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 밖 한산사의)
夜半鐘聲到客船(한밤 종소리가 나그네 뱃전에 들려오네)

장계는 당나라 중기 현종연간 사람이다.장안에 가서 과거를 보았으나 몇번 떨어지고 배를 타고 내려 오다가

경항대운하의 주요거점인 풍교에 배를 대고  하루를 묵었는데 풍교야박은 이때 쓴시다. 과거에 떨어져 닉심한 선비가

달지자 까마귀 울고 서리가 내린밤에 맞은편 강가의 고깃배 등불을 보고 시름에 겨워 잠못들어 하는데 성밖 한산사의

종소리가 뱃전에 부숴지니 외로운 밤에 시름은 더욱 깊어 졌을것이다. 무명이었던 장계는 이 詩하나로 만고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이시에 얽힌 애기들도 수없이 많다.당나라 무종은 이시를 무척 좋아해서 죽기 일개월전 당대 제일의

석공을 시켜 시를 돌에 새긴후 이 시비는 저 세상에 가져가서 내가 감상할것이니 후에 이시를 다시 돌에 새기는자가

있으면 천벌을 받으리라고 했다. 이비를 무종의 능에 같이 묻었다는 설이 있다 .진위여부를 알수 없으나 청말의 서예가

유월(兪 木+越)은 이시를  써서 비석에 새긴뒤 한달후에 죽었다는 야사도 있다.

 

 

 

명 가정연간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된 철령관.풍교경승지구를 볼려면 철령관옆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철령관을 통과해야 한다.

철령관은 京杭대운하를 방비하기 위한 요새다

 

풍교. 풍교야박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고대의 객선을 만들어 띄워 놓았는데(다리밑 노란지붕의배) 좀 조악하다

 

풍교는 초명이 봉교였는데 경항대운하의 요새였고 장계의 시로 유명해 졌다는 내용을 적은 안내판.

풍교는 한산사에서 약 200m. 입장권을 사서 철령관을 나오자 마자 좁은 운하위에 놓인 풍교가 나온다.

 

 

 

                      장계가 배를 댔을것으로 추정되는 야박처및 그곳에 있는 시비 탁본

 

 

풍교에서 운하를 따라 200-250m 걸어면 강촌교가 나온다. 풍교야박의 둘째행인 江楓漁火對愁眠의 강풍에 대한 해석이 엇갈린다.

청말의 학자 유월도 강풍어화 네글자는 의심스럽다 했고 송나라때 中吳紀聞이라는책에는 江村漁火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강풍을 대부분은 강가 단풍나무라고 보고 있는 반면 강풍은 강촌교와 풍교를 뜻한다고 보고 장계는 객선에서 강촌교와 풍교사이에

있는 고깃배 등불을 마주하고 시름겨워 했다고 번역하는 사람들도 있다. 중앙일보가 대표적이다. 나도 고깃배 불빛에 비친 단풍나무는

부자연스럽다 보고, 강풍은 강촌교와 풍교라고 보는것이 맞을것 같아 이번 답사에서 이를 확인하고 싶었다.

강촌교와 풍교사이에 고깃배들을 관광용으로 정박 시켜 놓은걸 보니 내 생각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으나, 풍교의 초명이 봉교였고

시가 유명해진 이후에 다리이름이 바뀌었다는 안내문을 보니 여지없이 확신은 의심으로 바뀌었다. 강풍이 강가의 단풍이면 어떻고

강촌교와 풍교면 어떠랴. 뭐가 맞던 시의 정취는 그대로다. 나는 천 수백년전 장계가 느꼈던 수심어린 감정을 떠올리며 운하를

거닐었다.

 

 

 

 

 

 

 

 

 

 

(위사진) 강촌교와 그 일대

 

 

 

한산사옆을 흐르는 경항대운하. 목책의 오른쪽은 현재도 화물선 바지선등이 다니는 운하이고,목책으로 막아놓은 왼쪽이 고운하인데 

 선박의 통항을 금하고 있다.이 고운하위에 강촌교와 풍교가 있다.

 

 

 

 

 

 

 

 

 

 

 

 

 

 

 

 

 

 

 

 

 

 

풍교 경승구, 고운하의 이곳저곳

 

 

 

고운하옆의 장계상. 장계는 唐의 수도 장안에서 과거에 떨어진후 京杭대운하의 남쪽 주요 거점인 소주의 풍교에서 배를 대고 하루를

잤을 것이다. 호북성 襄陽사람인 그는 운하를 따라 배를타고  대운하의 종점인  항주까지 간후 그곳에서 長江 수계를 따라 武漢을 거쳐 양양까지 갔을것으로 나는 추측한다

 

 

한산사 관광

 

풍교약박시에서는 한산사가 꽤 멀리 있는것 같은 느낌이지만 풍교에서 한산사는 지척이다.한산사는 6세기초에 건립된 사찰인데

절이름이 묘리보명탑원이었는데 禪詩와 한산과 습득 이야기로  유명한 당나라 고승 寒山子가 주석(駐錫)한 이후 한산사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옛건물들은 수차례 화재끝에 소실되고 지금의 건물들은 청대말에 지어진것들이라고 한다. 한산사는 풍교야박시비와 이를 탁본한것이 도처에

즐비하고 옛종들도 여기저기 걸려있는것이 절 자체가 온통 풍교야박시를 연상케하게끔 꾸며져 있다. 중국 화가들은 한산과 습득의 얘기를 즐겨

그렸다는데 이중 유명한것이 나빙(羅聘, 1733-1799)이 그린 寒山拾得圖라고 한다. 나빙의 한산습득도를 烏石에 새긴것이 대웅전부처뒤에

있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사전에 이를 몰라서 지나친것이 몹시 아쉽다.

풍교야박시가 일본소학교 교과서에 실려있고 당나라때 일본인 승려들이 한산사로 유학을 많이 왔던 까닭에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주 눈에 띈다.

어떤 블로그에 보니 한산습득도나 풍교야박시를 탁본한것이 USD100에 주지스님이 직접 일인들에게  팔고 있다고 하는것을 보았는데

중국인들의 장사속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거대한 오층목탑과 유월이 쓴 풍교야박 시비, 중국 역대 명필들쓴 풍교야박 시비 탁본들,

높이가 약 30M는 될것같은 거대한 종과 종루가 이절의 볼거리들이다.

 

 

 

 

 

 

한산사 절집을 들어서자 마자 촛불과 매캐한 향을 피우며 중국인들이 복을 빌고 있다.향이 산죽만큼이나 굵은것이 우리네 향과는 다르다.

 

 

 

 

 

 

 

 

높디 높은 오층탑.각층마다 다른이름이 있는데 일층은 보명보탑이다

 

 

 

 

 

 

 

 

 

 

도처에 있는 명필들의 풍교야박 시비들의 탁본. 각종 시설물에도 풍교야박 싯구를 써 놓았다

 

 

                         한산사의 옛종. 절안에 古鐘들이 대여섯개 걸려 있다.

관광객들에게 야반종성도객선의 이미지를 주기 위해 녹음된 종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온다. 이 절집은 장사하고 복을비는곳이지

경건한 선방의 느낌이 전혀없다. 이런 모습을 옛날 이절에 주석(駐錫)했던 한산자가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그의 선시의 표현을 빌리면

"얼마나 오랜 겁(劫)을 윤회(輪回) 하였는가? 눈먼 장님인채로". 한산사에서 장사하는 중들의 모습이 딱 이모습이다.

 

 

 

 

 

 

 

한산사의 거대한 종과 종루. 종루의 높이는 30m는 되어 보였다. 연대는 20세기 초반에 만든것 같다.

 

 

 

 

 

청말의 서예가 유월이 썼다는 거대한 풍교야박 시비를 감상하며 한산사 관광을 마쳤다. 작은 글씨는 明代의 文待詔(文徵明)이

쓴 풍교야박시가 오래되어 글씨가 희미하므로 유월이 다시 썼다는 내용이다. (寒山寺舊有文待詔所書唐張繼楓橋夜泊詩.歲久漫漶,光緖丙午 篠石中丞 於寺中 新葦數楹 爲余書刻石)

비 뒷면에는 반야심경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