維歲次 유감(遺憾)
인생의 각 단계에서 중요한 의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冠婚喪祭 이다.
冠禮는 고3 내지 대학에서 단체로 간단한 선물하나 주는 성인식으로 대체 되어 없어진지
오래이고 , 婚禮 역시 거의 서구식으로 바뀌어 전통의식은 剝製化 되었다.
비교적 전통이 남아 있는 것은 喪禮와 祭禮 하겠는데 , 죽은이와 결별하는 상례의식은
시대에 따라 간소화 내지 변천을 계속하되, 아마 극단적으로 간소화 하거나 생략하기는
힘들것이다.그러나 제례의 경우는 현재의 추이로 짐작컨대 앞으로 없어지거나 아주 간소화되어 유명무실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朱子家禮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도 현대에 들어서면서 제사는 없어진지 오래인데, 아직까지 우리에게 중요한 의식으로 지속되고 있는 현상을
미풍양속이라고 볼수도 있으나, 주변 문화의 경직성이라고 해도 될것인지는 모르겠다.
유교식 제사를 지낼적에 중요한 절차 가운데 하나가 祝文을 읽는것이다. 요즈음은 한글 축문을 읽는 집안도 많고, 아예 축문을 생략(무축)하는 문중도 많이 있다. 한문식 축문을 읽는(讀祝)하는경우, 정형화된 문장의 첫머리는 “維歲次干支 某月 干支 朔 某日 干支 으로 시작한다.
維는 발어사로서 의미가 없으며 굳이 해석하자만 아~! 정도가 되거나 이제! 정도가 되겠다. 歲次는 해의 차례라는 뜻인데 “아! 이제 해의 차례는 갑신이고 몇월 며칠 효자 누구는 운운”한다.(여기서 孝子는 장자를 의미한다)
제사를 지내는 해를 조상께 고하고자 한다면 西紀,檀紀,佛紀등을 쓰면 될것이지, 하필이면 해의 차례가 60년마다 되풀이 되어 지금이 몇 년인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六甲을 썼을까?
明이 멸망한 이후에도 관념론에 사로 잡힌 조선의 사대부들은 再造之恩 운운 하며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면 마치 오랑캐로 전락한다는 것이 시대정신 이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尊明反淸 大義아래 실천의지도 없는 관념론만의 北伐論을 내 세워 조선을 우물안의 개구리로 만든 것이 仁祖 이후의 지배층 이었다.
중국에 事大하는 조선으로서는 明이 멸망하고 ,淸을 上國으로 섬기는 마당에 청의 연호를
당연히 써야 했다. 조정의 외교문서에는 어쩔수 없이 康熙,乾隆등 청의 연호를 썼지만 , 尊明反淸 및 華夷論에 젖어 있는 민간에서는 망한 명의 연호를 변형하여 쓰거나, 歲次oo 라는 애매 모호한 太歲를 사용했던 것이다.(국내용 조정 문서도 망한 명의 연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슴)
병자호란 이후의 비석을 살펴보면 연호가 崇禎後 몇 년 등의 연도 표시를 많이 볼수 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인 숭정이 죽은후 몇해라는 표시인데, 죽어도 오랑캐인 청나라의 연호는 쓰지 않겠다는 우리 조상의 결연한 의지가 보이기도 하지만, 동아시아의 시대적인
조류를 외면하고 명분론에 집착한 우리 조상의 아집이 안타깝기도 하다.(심지어 숭정후 재 갑자라는 것도 볼수 있는데 이는 숭정제가 죽은후
두번째 갑자년 이라는것이다)
요즈음 미국의 6.25때의 은혜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군상들을 볼 때, 명나라에 대한
은혜만을 읊조리며 국제정세 변화에 오불관언 했던 조선 중후기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축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명이 멸망한 이후 사용할 연호가 없어진 우리조상들은 존명 반청의 대의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는 명분론으로 축문에 “ 維康熙23년 오월 ..”이라고 하지 않고 “유세차 갑신 오월..”이라고 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조선내내 연호을 가지지 못하다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비로소 광무 및 융희라는
연호를 가졌고 , 한말에는 축문에 유 광무00년등의 연호를 썼으며, 일제 초기에는 유 개국00년 등의 자주적인 연호도 사용되게 되었다.(개국은 조선 개국을 말함)
일제시대에 우리 민중은 또다시 쓸 연호가 없어져서 , “유세차 태세”형식으로 해를 표시 했는데,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마 서울의 친일
권문세가 에서는 “維昭和 모년 모일”식으로 축문을 썼으리라 추정을 해 본다.
연호도 없어지고, 육십갑자로 해를 표시하지도 않는 현대에서는 축문에 어떻게 해를 표시 해야 할까?낙산의 집에서는 양력 기준으로
유단기4333년11월 초삼일…등으로 간지니 삭이니, 일진이니 하는 것을 생략하기로 합의 했다. 원래 서기로 하자고 낙산이 주장하였으나,
다수가 단기가 좋다고 하여 단기를 쓰고 있다.
이문제에 대해 성균관은 단군기원을 쓸 것을 권유하며 축문을 “維檀君紀元4333년, 歲次干支 某月 干支 朔 某日 干支”를
쓸 것을 권유 하고 있다.
현대에 있어서 제사라는 것은 그냥 관습을 따르는것이고 조상을 추모하고 친족간의 모임을 통해 우의를 다지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으나, 점차 그 형식이 간소화되고 전통제례에서. 벗어나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다.
굳이 유세차 운운하며 태세문제를 제기한 것은 이와 관련된 조선의 명분론을 살펴보고자 한 의도이다.
낙산 조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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