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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깊은 가을에 있었네(19.11.2일 문경새재 산행)

낙산유정 2019. 11. 4. 15:22

10월5일 계성 63 산우회 정기산행때 배세달 동기가 11월 정기산행은 문경새재를 제안을 하여 추진하게 되었다.

처음엔 큰 호응이 없어서 16인승 미니버스 정도를 예약하려다가 점점 참가신청이 늘어서 최종적으로 10부부와 SINGLE 1명 총 21명이

되어서 대형 버스 한대를 대절하여 남행길에 오르게 되었다.11.2일 7시10분에 목동을 출밯하여 양재역에서 한팀 8시에 동천역에서 용인 분당

친구들을 태우고 괴산의 소조령 입구에 있는 고사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대략 10시 20분 경이었다

나는 이번을 포함하여 4번 새재길을 걷게 되었다. 주흘산과 그인근의 조령산, 신선봉, 마패봉등을 올랐다가 하산할때 새재 옛길을 이용했었는데

오직 새재만을 걸은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새재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설들이 있다. 새들도 날아 넘기 어렵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억새풀이 많는 고개, 하늘재와

이우리재(이화령) 사이(새)의 재, 새로 닦은길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등 여러 설들이 있다.

여하튼 영남은 새재(鳥領) 남쪽이라는 뜻이다.

나는 서울서 고향 상주를 오갈때 하행길에 주흘산이 보이면 아! 이제 다왔구나 하는 반가움에 마음 설레이고, 귀경할때는

조령산맥을 지나며 신사임당의 유대관령 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라는 시를 되뇌이며 늙으신 어머니를 상주에 두고 서울로 떠나는

마음을 달래곤 했었다.내가 딸이 아니고 아들이지만 노모가 계시는 고향집을 떠나는 심정은  옛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소조령길

 

보통 문경새재는 1관문에서 시작해 2관문 3관문에 이르는 편도 6.5km 길을 왕복하지만 우리는 갔던길을 되돌아오는 단조로움을

피할겸,걷는 거리도 줄일겸 해서 소조령--3관문(2km)--2관문(3.5km)--1관문(3,0km) 총 8.5km코스를  3시간반 정도 걷는것을 A코스를

잡고 ,관절이나 발 상태가 안좋은 친구들을 위해 1관문에서 2관문을 왕복하는 길을 B코스로 잡았는데 한부부를 제외하고는 전원

A코스를 걷기로 하였다.문경에서 3관문까지 오르는 6.5km에 이르는  긴고개를 새재(조령)라고 하고 , 3관문에서 괴산 연풍면으로

내려가는 2km가 채안되는 짧은 고갯길을 소조령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소조령을 올라 문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소조령 입구의 이화여대 수련원에 이르니 수려한 단풍이 우리를 맞아 주고 조금더 오르니 빨간 단풍잎으로 치장하고 저마다 고운 자태를

자랑하는 큰 나무들을 만나 그아래서  첫번째 단체 사진을 찍었다

만추는 쓸쓸한 느낌을 주지만 소조령 가을숲의  청량한 기운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활기차고 싱그럽게 하였다.  붉은 단풍과 참나무류의

노란 단풍잎이 조화를 이루어 소조령 황토 고갯길을 아름답게 꾸몄고 초로의 친구들은 소풍온 소년소녀들처럼 저마다 애기꽃을 피우며

이길을 걸었다.

울긋 불긋한 숲길을 다정하게 걷는 친구 부부들을 바라 보자니 단풍나무의 붉은 잎이 젊은이들의 정열적인 사랑을 나타낸다면  ,

참나무와 같은 활엽수의 노란 단풍은 초로에 접어든 우리들의 사랑과 같이 깊고도 은은하게 산길을 수놓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걸은지 1시간이 안되어서 벌써 3관문부근에 이르렀다.

3관문에 이르면 맨먼저 갓쓴 선비상이 우리를 맞아 준다.이길이 영남에서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는 옛길이라는것을 상징하기 위해

선비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리라 .과거를 보는 영남의 옛 선비들은 반드시 문경 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갔다고 한다.

추풍령은 추풍낙엽같이 떨어지고 죽령은  죽죽 미끄러진다는 속설때문에 과거길의 선비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을 지나

새재를 넘어 갔던 것이다.

문경 새재는 또한 전통시대에는 국방의 중요한 요충지이자 영남대로와 충청도를 잇는 주요 통행로서 교통과 물류의 거점이기도 했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세곡은 낙동강 수계를 따라  배에 실려 상주끼지 와서 하역한후 , 소달구지등으로 새재를 넘어

충주까지 육로로 운송한후 다시 충주에서 남한강을 타고 수운(水運)으로 한양에 이르게되는 운송체계를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명박의 대운하 구상도 조령산맥에 굴을 뚫어 상주의 낙동강과 충주의 남한강 물길을 잇는것이 핵심이라고 할수 있다.

3관문 부근 백두대간조령 큰 비석 옆에 서서 충주쪽을 바라보면서 임진왜란때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과 8000여 병사들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사람들은 새재 옛길을 걸으며 신립 장군이 왜 이 천험의 요새에다가 병력을 매복시키지 않고 개활지인 탄금대에 진을 쳐서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대패를 했을까? 탄식하게 된다.

신립이 조방장 김여물, 상주에서 패한후 합류한 순변사 이일등의 건의를 무시하고 탄금대에 진을 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전략적 패착이었슴은 수많은 전설로도 각색이 되어 전해 지는데, 그런 이야기들의 대강은 '신립이 그를 사모한 한 여인을 거두지 않아

그여인이 자살하게 되고 ,한을 품은 여인이 신립의 꿈에 나타나 탄금대에 진을 치게끔 홀렸다'는 내용으로 대동소이하다.

결국 신립이 귀신에 홀리지 않고서야 새재를 버리고 탄금대에 진을 칠리가 없었다는 전설이며, 이는 신립의 전략적 판단에 대한 아쉬움이

민중들에 의해 각색되어 전설이 되었다고 볼수 있다.

후일  다산 정약용은 탄금대를 지나며(過彈琴臺)라는 시를 지어 신립의 전략적 오판을  탄식하였다

(欲起申立與論事,啓門納寇溪爲哉 신립을 일으켜 애기나 해 보았으면 , 어찌하여 문을 열고 도적을 맞이 했을까?)

제 3관문, 조령관은 숙종때(1708년) 북방의 오랑캐들을 막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우리들은 3관문 주변에서 휴식하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위) 소조령 입구에서 단체 사진

 

(위) 노란 활엽수 단풍. 나는 붉은 단풍보다 은은한 노란색 단풍을 좋아한다.

 

                       (우) 과거길에 나선 선비상

 

(위) 백두대간 조령비

 

(위) 3관문인 조령관 앞에서 인증사진

 

조령관(3관문)--2관문(조곡관)

 

제 3관문인 조령관에서 2관문 조곡관을 거쳐 1관문인 주흘관까지 약 6.5km의 완만한 경사길이 새재 옛길이다.

지금은 황토와 마사토를 깔아 길을 정비하여 아주 걷기 좋게 만들었지만 조선시대에는 험준한 고갯길이라 새재에 얽힌 전설도 수없이

많다고 한다. 3관문에서 약 1.2km인 동화원에 이르니 파전과 막걸리를 파는데 성업중이다. 동화원은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원(院)이 있었는데 1970년대까지 화전민 마을이 있어소 초등학교의 분교가 있었다고 한다.막걸리꾼인 우리의 산행 대장 조 영봉이

동화원 막걸리 파전집을 그냥 지나치는것을 보니 참새가 방아간을 그냥 지나가는 법은 없다라는 속담도 틀릴때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우리는 3관문에서 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때문에 왼쪽으로는 산을 끼고 오른쪽에는 계곡을 옆에 두고 내려가는 코스인데, 계곡을 흐르는

조령천의 시원한 물길이 동화원 부근에서 부터 시작이 된다.동화원을 지나면 이진터라는  푯말이 길손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애초 신립은 8000병사를 이끌고 제1진을 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이를 지원하는 2진을 이곳에 배치했는데,

조령에서 적군을 맞아 싸우자는 김여물등의 간언을 물리치고 이진터등 조령에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위장하고 충주 달천의 탄금대로

병력을 이동했다고 적혀 있었다.

단풍에 취해 친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이 어느듯 제 2관문인 조곡관이 가까워 지고 , 문득 아리랑 가락이 흘러 나와 걸음을 멈추어 보니

문경새재 아리랑비가 서있었다,문경 아리랑은 생소하지만, 큰 고갯길을 넘나드는 민초들이 문경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나름대로의 

가사를 붙인 아리랑을 부르면서 부르면서 고달픈 삶을 위로하지 않았나는 생각이 들었다.

조곡관에 이르러 가져온 떡과 맥주를 마시면서 쉬었는데, 나중에 사진을 보니 음주를 하지 맙시다 라는 현수막 앞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위) 이진터 안내판을 보고 있는 친구들

 

(위) 문경새재 아리랑비석

 

(위) 단풍잎을 즈려 밝고 걷는 친구들

 

(위) 2관문 조곡관앞에서 기념 사진. 조곡관은 숙종때 조령관과 같이 건립되았다.

 

(위) 조곡관 성벽에 기댄 63마나님들

 

(위) 2관문 조곡관에서 단체사진

 

 

(위) 2관문 부근에서 간식및 휴식

 

조곡관에서 주흘관

 

문경새재 옛길은 전체적으로 완만한 경사에 황토를 깔아 놓아 맨발로도 걷기가 편한길인데, 그나마 3관문에서 2관문사이와 소조령길은 경사가

있는데 반해 2관문(조곡관)에서 1관문(주흘관)까지는 아주 완만해서 유치원생들은 물론 젊은 부부들이 유모차를 끌고 걷는것을 볼수 있었다.

조곡관을 나서서 산기운에 취해서 걷다보면 한눈에봐도 범상치 않은 모양의 교귀정이라는 옛 건물을 만나게 된다.교귀정은 새롭게 도임하는

신임 감사와 이임하는 감사가 관인(官印) 인계인수 하던 곳으로,15세기 말에  건립되었던 원건물은 구한말에 불에 타 소실되어 1990년대에

다시 지은것이라고 한다.조금더 내려가면  조령원터가 있는데 들어가 보니 옛건물은 간데 없고 허름한 헛간같은 큰 건물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원은 공무로 출장가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곳인데 문경새재에는 조령원과 우리가 지나온 동화원외 신혜원이 있었다고 한다.

폐허가 된 원터를 보니 대명들의 참근교대와 상업의 활성화로 인해 여관이발달했던 일본에 비해 우리 조선은 숙박시설이 드물어 길을 떠나도

묵을곳이 마땅치않았다는게 실감이 난다.

단풍숲에 취해서 걷다가 보니 어느듯 목적지인 일관문, 주흘관에 도착 하였다.

주흘관은 왜적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임란중인 1594년에 건립되었는데, 현재 수리를 위해 누각을 해체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지나쳤지만

몇년전에는 일관문 근처에 있는 시비들을 보았는데 그중 김시습의 시를 기록해 놓은것이 있어 여기에 소개해 본다.

새재 입구에 있는 새재 할매집에서 문경약돌돼지 고추장구이, 더덕구이,파전과 막걸리로 뒤풀이를 하였다(밥값을 스폰스한

이광식 이윤희 배세달친구에게 감사를 드린다)

오늘 나는 깊은 가을에 있었고,  친구들과의 우정도 가을밤처럼 그렇게 깊어갔다.

 

踰鳥嶺 宿村家(새재를 넘어 시골집에 묵다)   매월당 김시습

 

嶺分南北與東西 (영분남북여동서) : 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뉘는데
路入靑山縹渺 (노입청산표묘 ) : 그길은 아득한 청산으로 들어가네
好嶺南歸不得( 춘호영남귀부득 ) : 이 좋은 봄날에도 고향으로 못가는데
鷓鴣晝五更風 (자고제주오경풍) : 소쩍새만 울며 불며 새벽 바람 맞는구나.

(위) 교귀정
(위) 조령원터
(위) 단풍보다 고운 63회 MRS.님들

(위) 새재 할매집에서의 뒤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