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국내여행

주흘산 문경새재 산행(2013년2월23일)

낙산유정 2019. 7. 19. 17:52

주흘산 답사기 , 조영우

2013년 2월 23일 어떤 모임의 일원으로 문경 주흘산을 등반하게 되었다.등산도 하고 싶었지만
간김에 고향 상주에 다녀올 생각에 화물 산꾼 정기 산행도 불참하고 몸살기 있는몸을
이끌고 남행길에 오르게 되었다.산행 코스는 새재 1관문에서 시작하여, 여궁폭포,혜국사
주흘산 정상(주봉)-꽃발서들-조곡관(2관문)-1관문으로 원점회귀 하는데 5시간 잡으면
꽤나 여유가 있는 코스지만, 약 20명의 인원중 초보 느림보 산꾼들이 많고, 도중에
라면을 끓여 먹는 관계로 6시간이 걸렸던 ,나로서는 다소 지루한 산행 이었다.
내혼자 산행 하였으면, 1관문-주봉-영봉-부봉(1-5봉)-3관문-2관문-1관문으로 회귀하는
코스를 잡았을 테지만 , 이팀원들의 실력으로는 무리가 따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2월 18일 덕유산을 종주 하면서 본 장대한 능선과 설경의 잔상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부봉-3관문 코스를 못보아서 그런지, 이번 주흘산 눈꽃 산행은 산행 자체로는 그렇게
특별한 감흥은 없다. 아무래도 이번길은 산행과 더불어서 새재 옛길에 있는 관문등
문화 유산을 본 것이 일석 이조의 묘미가 있었던 것 같다.

낙산은 고향길 오갈적에 주흘산이 보이면, 하행길엔 ‘아 이제 고향에 다 와 가는
구나,상행길엔 이제 고향을 떠나는 구나’라곤 혼자서 되뇌이곤 한다.
처음엔 애들에게 이러한 느낌을 애기도 해 봤지만 , 수도권에서 나고 나란 놈들이
무슨 감흥이 있을리가 없어, 이제는 혼자서 독백만 하곤 한다.아뭏던 이번 산행에는
새재 옛길을 걸었던 것이 산행 자체보다 오래 추억에 남을 것 같다.

문경 새재

새재라는 말의 유래에대해서는 여러설이 있다. 문경시청 홈피에는 새들도 날아 넘기 어렵다는 뜻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과 , 억새풀이 많은 고개,하늘재와 이우리재(이화령)
사이(새)의 재,새로 닦은 길이라는 뜻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등이 소개되어 있다.여하튼
영남은 새재(조령)남쪽이라는 뜻이다.

새재의 기능

전통시대의 새재는 1) 국방의 요충지 2)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교통요로인
영남대로상의 가장 중요한 고갯길,3) 영남 선비들이 과거보러 갈 때 통상
넘어가는길이기도 했다.

과거 영남에서 한양을 갈 때 넘어야 하는 고개 가운데 새재(조령), 추풍령,
竹嶺(대재) 이 대표적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은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해서, 죽령은 죽죽 미끄러 진다고 해서
가지 않고, 반드시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경사를 듣는다는 뜻의 문경이라는
지명 또한 새재가 과거길이 되는데 일조 했는지는 잘모르겠지만…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큰길이 영남대로 이다. 동래에서 출발하여 밀양을
거쳐서 대구,선산 해평,상주,문경,충주,음성,일죽,용인,성남,서울에 다다르는 전통
시대의 대표적인 대로이다. 사람뿐 아니라 물류의 중심도로인 셈이다.
과거 세곡(稅穀)등의 물자는 대개 영남에서 낙동강 수계를 이용 배를 타고 상주까지
와서 하역한후 소 달구지등으로 새재를 넘어서 충주에서 하역한후 다시 남한강 수계를
이용하여 水運으로 한양에 이르게 하는 운송체계를 많이 이용 하였다고 한다.
결국 상주와 충주 사이는 육운으로, 기타구간을 강을 이용하여 운반하는 복합운송
체계인데, 이명박 대통령의 운하 구상은 조령산맥 밑으로 물길 터널을 뚫어서 상주의
낙동강과 충주의 남한강을 물길로 잇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수 있다.

문경 새재 옛길을 걷다 보면, 이곳이 적을 막을수 있는 천혜의 요새라는 것을
삼척 동자라도 한눈에 알수 있다.당연히 조선 조정은 이 천험의 요새에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였는데 모두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고 난뒤의 일이라 만시 지탄을
금할수 없다

 

1관문 주흘관 : 임란 발발 2년후 1594년에 건립

2관문 조곡관(사진) : 숙종 34(1708)건립3관문 조령관 : 조곡관과 같이 건립
새재 옛길에서 사람들은 신립 장군이 왜 이 천험의 요새인 새재에다 병력을매복시키지 않고 개활지인 충주 탄금대에 진을 쳐서 하루도 못견디고 대패했을까? 탄식하게 된다.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신립을 변호하는 입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

  1)오합지졸로 급조된  군대를 조령에 매복시킬 경우 병력 통제가 되지 않고 도망병이 속출하게 된다.      죽기로 싸우게 하기 위해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2)신립은 기병전을 주특기로 하는 장수이고, 신립의 8000군대중 주력이 기병인바, 개활지에서 기병으로     적을 타격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3)왜병의 진군속도가 빨라 새재에 올라 진을 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전투 당시 조방장 김여물, 상주에서 패한후 합류한 이일등 참모들이새재에 진을 치자고

주장한 것을 신립이 듣지 않은점등 신립의 전략적 판단은 극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낙산 역시 적은 군사로서 잘 훈련된 왜군을 대적하고 진군을 늦추기에는(새재에서 막아도 패배는 피할수 없었을 것임) 새재에 진을 쳤어야 했었다는 생각이다.

 

신립의 전략적 오판은 한여인의 한 때문이라는 수많은 전설이 있는데 이야기 줄기는

신립을 사모한 한 여인을 거두지 않은 결과로 그 여인이 자살하게 되고, 그여인이 신립의 꿈에 나타나 탄금대에 진을 치게 하였다는 내용으로 대동소이하다.결국 신립이 귀신에 홀리지 않고서는 탄금대에 진을 칠리가 없었다는

전설이며,이는 신립의 전략적 판단에 대한 아쉬움이 민중들에 의해 각색되어 전설이 되었다고 볼수 있다.

새재에 진을 치지 않은 신립의 오판에 대한 아쉬움은 선조 실록, 난중 잡록등에 기록되어 있고, 문학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후에 다산 정약용은 아래와 같이 시를 지어 아쉬움을 토로 하고 있다.

   

과탄금대(過彈琴臺)

영애도진지척개   (嶺隘度盡地倜開험준한 재 다 지나고 대지가 확 트이더니깅심용출탄금대   (江心湧出彈琴臺)    강 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 나왔네욕기신립여론사   (欲起申砬與論事)    신립을 일으키어 얘기나 해보았으면..계문납구계위재   (啓門納寇溪爲哉어찌하여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였을까.
이하 생략

 

조곡관(2관문)에서 1관문으로 하산하는 길에는 경상 감사가 경상도 땅에 첫발을내딛고 신구 감사가 관인을

인수 인계 하는 장소라는(交印處)  交龜亭, 새재를 넘기전 관리들이 하룻밤을 묵었다는 조령 원()터 등이

대표적인 볼거리이며, 조령 관련된 유명한 시들을 새겨 놓은 시비 들이 있다. 그중 마음에 드는 두수를 소개해 본다.

踰鳥嶺 宿村家(새재를 넘어 시골집에 묵다)   매월당 김시습

 

嶺分南北與東西 (영분남북여동서) : 새재는 남북과 동서를 나뉘는데
路入靑山縹渺 (노입청산표묘 ) : 그길은 아득한 청산으로 들어가네
好嶺南歸不得( 춘호영남귀부득 ) : 이 좋은 봄날에도 고향으로 못가는데
鷓鴣晝五更風 (자고제주오경풍) : 소쩍새만 울며 불며 새벽 바람 맞는구나.

途中   , 李 晬光

岸柳迎人舞(안류영인무) : 강둑 버드나무 사람 보고 춤을 추고

林鶯和客吟(림앵화객음) : 숲 속 꾀꼬리 나그네 따라 노래 부르네.

雨晴山活態(우청산활태) : 비 개이니 산 모습 산뜻하고

風暖草生心(풍난초생심) : 바람 따스하니 풀잎 돋아나네.

景入詩中畵(경입시중화) : 풍경은 시 속에 그림처럼 읊어지고 泉鳴譜外琴(천명보외금) : 개울물은 악보 없는 가락을 타네.路長行不盡(노장행불진) : 길은 멀어 가도 가도 끝이 없고
西日破遙岑(서일파요잠) : 지는 해는 저만치 산마루에 부서지네(번역은 김시습의 시는 새재에 있는 것을 옮겼고, 이수광의 도중은 밧데리가 다되어 사진을 찍지 못해 인터넷에서copy한것임)

(위) 김시습시비

(위) 교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