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3월 7일 예정이었던 계성고 63회 산우회의 시산행사를 5.2일에야 치룰수 있게
되었다. 약 2달간 COVID-19로 인해 반쯤 갇혀 살다가 오랫만에 가지는 모임이라 그런지
18명(동기16명 부인 2명)이나 참가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우리는 점심전 봉산-앵봉산을 걷고, 뒤풀이 점심후에는 원하는 사람들만 서오릉을 산책하기로
했다. 봉산-앵봉산 코스는 서울 둘레길 7-2 코스로서 길이 평탄하고 주변에 월드컵 경기장
한강조망등 경관이 아름다워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코스이며,서오릉을 답사 할수 있는 이점이 있다.
집합시간 : 6호선 DMC역 5번출구 10시
산행 시간 : 10시10분-1250분
점심식사(주막 보리밥) 1300-1400
서오릉 답사(일부인원은 불참) : 1420-1600
참석자(무순) : 최민식 배세달 손영주 문학배 박종윤 노갑환 정원대 김진효
조진현 김철영 이용욱 신창호 강의국 조영우 심용창+1 조영봉+1
총16명(+부인2분)
특기 사항
ㅇ 배세달 동기 : 산우회 발전 기금 20만원 찬조
ㅇ 조영봉 총장 : 떡 20인분 기부및 막걸리 2병, 감자전등 부침개등 준비
시산예배
DMC역 5출구에서 나오면 DMC 청구 아파트 뒤편에서 봉산으로 연결돠는 계단을 오르면
산길로 접어든다.
코로나 상황에서 근 석달만에 갖는 산우회 모임이라 그런지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천천히 걸으며 세상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퇴직이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슴에도 불구하고 국내및 하와이의 전시회에 출품하는등 가히 프로급의 실력으로 화단 활동을 하고 있는 강의국 화백의놀라운 성취가 화제가 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독립 유공자들을 배출한 안동에 대한 이야기등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며 걷다 보니, 봉수대 전방 약 1km 지점에 있는 시산행사 장소에 도착 하였다.금년도 시산행사는 산신제를 지내는 대신 MISSION SCHOOL을 나온 계성고 출신들답게 찬송과 기도로 진행 하기로했다. 동기 최민식 목사께 시산 예배를 인도해 줄것을 요청 하였고 최 목사의 인도 아래 간단한 찬송과 기도를 드렸다.목사님은 우리의 안전 산행과 투병생활을 하는 최성재 동기를 비롯하여 모든 친구들의 건강과 행복을 하느님께 빌어 주았다.최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시산예배후 봉수대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서오릉 건너편의 유명한 수제비 맛집 주막집에 이르러 뒤풀이를 가진후일부는 귀가하고 나머지 12-3명은 서오릉을 답사 하였다.
(위) 기도하는 최민식 목사님과 조영봉 총장.
(위 꽃사진) 김진효 작가이 작품
서오릉 답사
서울 둘레길 봉산-서오를 코스는 트레킹과 더불어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싸인 왕릉을 답사 할수 있어 매력적이다.
서오릉은 명릉(숙종, 인현왕후, 인원왕후) 익릉(숙종의 첫번째 왕비 인경왕후), 창릉(예종과 계비 인순왕후)
경릉(덕종과 인수대비) 홍릉(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다섯릉과 순창원, 수경원, 대빈묘(장희빈)가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두패로 나뉘어 답사를 하였다. 내 일행은 문화 해설사인 문학배 박사, 숲과 사진에
일가견이 있는 김진효,안동 출신답게 역사에 박식한 이 용욱 , 그리고 엉터리 잡학을 지껄이는 빈깡통인 내가 아름다운
숲을 감상하고 왕릉의 장중함을 느끼며 어울려 걸었다.죽은 임금들이 영면하는 장소는 언제나 분위기가 장중하다.
신주를 모신 종묘에서는 죽은 자들을 위한 건축공간에서 장중함을 느낀다면 육신이 잠든 왕릉은 숲으로 둘러 싸인
땅의 기운에서 엄숙함과 기가 모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해설사 문박이 능참봉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왕릉 부근의 나무를 지키는 일이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장품을 별로 묻지 않은 조선왕조의 능묘에 도굴꾼은 없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왕릉 주변의 아름드리 소나무에 눈독을
들였을 것이 분명하다.
서오릉에서 눈길을 끄는 능묘는 단연 숙종과 인현왕후가 묻혀 있는 명릉과 장희빈의 대빈묘이다
여기에 묻힌 다른 임금들이야 덕종은 추존왕이고 예종도 재위 1년여에 불과했던 왕이니 존재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숙종 인현왕후 장희빈
서오릉의 중심은 단연 숙종의 명릉이다. 숙종은 조선후기에서 가장 왕권이 강했을 뿐 아니라 장가도 네번이나 들어
4명의 왕비가 모두 서오릉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숙종은 당시로서는 비교적 장수(만59세)했을뿐 아니라 장기간
재위(45년간, 1674-1720)하는 동안 불같고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3번에 걸친 환국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대동법 균역법을 실시 했을뿐 아니라 상업개혁과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경제면에서 업적을 남겼다.
현대의 대중에게는 이보다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에 얽힌 궁정비사로 유명한 임금이기도 하다. 사실 인현왕후의 퇴출,
장희빈의 등장과 왕비책봉, 인현왕후 복권및 장희빈 사사로 이어 지는 이 궁정 드라마는 숙종의 변덕과 여인들간의
암투로 인해 훌륭한 TV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지만 본질은 당쟁과 정치에 있다. 즉 인현왕후를 폐서인 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책봉한것은 숙종이 노론에서 남인으로 정권교체를 하기 위한 것이었고(기사환국), 인현왕후를
복권시키고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못내 죽이기까지 했던 것은 노론을 복권시키고 남인을 몰아내는
경술 환국 이라는 정권교체의 과정과 결과의 한 부분이라 할것이다.
우리 영남은 남인들의 근거지이다. 장희빈은 악녀의 이미지가 고착화 되어 있는데 이는 노론인 서포 김만중이 지은
사씨 남정기의 영향과 승자인 노론이 장희빈을 끊임없이 악녀로 만든 결과로도 볼수 있다. 장희빈은 남인과 밀접한
관계였기 때문에 영남에서는 장희빈의 악녀 이미지가 기호 지방에 비해 덜하고 장희빈의 퇴출을 몹시 아쉬워하는
정서가 있는것이다.
3명의 숙종비들은 남편과 함께 서오릉에 묻힌것은 당연하지만 다른데 묻혔던 장희빈묘를 이장하여
이곳 서오릉에 모신것은 아이러니 하다. 숙종이야 한때 사랑하였던 여인이니 가까이 있는것이 좋겠지만 희빈 장씨는
원수지간인 인현왕후와 이웃하는것이 죽은 다음이라도 반가운 일이겠는가.
숙종의 갑술환국이후 한말까지 영남의 남인은 제대로된 벼슬에 등용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는등 담소에 열중하다
보니 행보가 늦어졌다. 입구에서 기다리던 다른 동기들이 빨리 오라고 재촉을 하여 장희빈의 대빈묘는 옆으로
지나가기만 하었다.
63회 친구들과의 오랫만의 소풍은 그렇게 끝이났고 다음 산행이 기다려 진다.
(위) 숙종과 인현 인원왕후의 명릉
(우) 서오릉 숲길을 걷는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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